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단 편집) === 제2대 총선 (1953) === ||<-6> 1953년 9월 6일[br]{{{-2 총원: 487석, 과반의석: 244석}}} || ||<-4><#000000> [[콘라트 아데나워|{{{#fff '''아데나워'''}}}]] {{{#fff '''2기 내각'''}}}[br]{{{-2 {{{#fff '''333석'''}}}}}} ||<-2> 야당[br]{{{-2 154석}}} || ||<#000000> [[CDU/CSU|{{{#fff CDU/CSU}}}]] ||<#ffed00> [[자유민주당(독일)|{{{#000 자유민주당}}}]] ||<#ffb612> {{{#000 전후이주자연합[*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출신의 실향민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전후이주자연합이라는 것은 각종 정치/외교적인 상황을 고려한 중립적인 의역이고, 실제로 독일어 원어로는 훨씬 더 강경한 어감인 실향-추방민연합(Bund der Heimatvertriebenen)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만 비례대표 의석을 획득했으며 1961년 독일당에 통합되었다.]}}} ||<#074ca1> {{{#fff 독일당}}}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185890> [[가톨릭 중앙당|{{{#fff 중앙당}}}]] || || 243석[br]{{{-2 191석+52석}}} || 48석 || 27석 || 15석 || 151석 || 3석 || 이 선거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독일의 선거 제도로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초대 총선에서 각 주 별로 5% 이상 득표한 정당에게 의석을 배분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봉쇄조항]]을 전국 단위 5%로 격상하였다. 봉쇄조항의 규정이 까다로워진 대신, 초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투표 결과만을 바탕으로 비례의석을 분배했던 것과 달리, 지역구 선출과 별개의 전국 단위 정당 투표, 다시 말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이 때부터 도입된다.[* 참고로 제2대 총선 이후 일부 지역에만 출마하면서 봉쇄 조항을 충족(5%이상 득표)하는 정당은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유일하다.] 전후 복구, 민주주의 확립, 경제 성장을 이뤄낸 여당 CDU/CSU이 초대 총선과 비교해서 득표율이 10% 이상 늘어나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단독 과반수에 단 한 의석이 부족했던 CDU/CSU는 지난번과 달리 2개 이상의 당과 연정 구성을 할 필요는 구태여 없었지만, 범우파 진영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아데나워는 자민당 이외에도 독일당과 전후이주자연합을 모두 연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반면 당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쿠르트 슈마허를 1년전 뇌졸중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잃은 사민당은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대체자로 내세웠지만 지난번 총선과 비교해서 오히려 득표율이 떨어지면서 완패를 맛보았다. 이 때부터 서독이 연합군으로부터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회복함에 따라 연방의회 역시 완전한 주권 국가의 의회로 기능하게 되었고 더 많은 책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기민당이 주도하는 서독 정부와 의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서독의 신뢰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는데, 2대 연방의회가 이룬 주요 업적은 [[로마 조약]]을 통해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 및 연방군 건설을 통한 서독 재무장 등이 있다. 이 선거에서 [[독일 공산당]]은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으며 이후 1956년 독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서 강제로 해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